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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앵~~~

카테고리 없음 2017. 5. 28. 04:20

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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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 관계들로 인해 내 안의 말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익숙해질까 싶다가도 다시 곪아온다. 게임을 지웠다. 그리고 또 게임을 지웠다.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의 가치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만, 가치있는 무엇으로 빼곡하게 보낸다는 것이 나에게는 숨막힌다. 그것은 어떤 routine을 의미한다. routine을 '굴레'로 써 보려 했는데, 식상하고 부정적이다.


routine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의해 안정감을 찾는다 착각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스트레스의 능률적 처리를 의미한다. 일어나서 턴 테이블 위에 LP를 걸고 커피를 내리는 중산층의 아침같은 판타지를 노래할 바보가 어디있겠나. 나이가 들어가며 그 routine에 경중을 매기고 넘어가도 좋을 것들과 넘어가면 안 될 것들만 구분해도 치매는 이역만리 판타지라 되겠지.


여튼 타자의 혹은 집단의 sub가 되어 이러한 구성성분이 잘 작동하게끔 하는 일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강해져서 마구 휘두르는 사람이 되라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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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6. 7. 26. 05:46

199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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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었는지 술에 취해서 터벅터벅 총학생회실로 올라갔다. 아마 109주년 노동절 전야제 준비때인 것으로 기억나는데, 대동제일수도 있고 - 기억이란 뭐. 여튼 술에 취해 갑갑함을 느끼며 총학생회실에 올라가니 부총학생 회장이 있었다. 여성이었다. 헐거운 쇼파에 마주 앉아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저는 몇학번 무슨꽈 누구입니다"로 시작한 나는 이거저거 물어봤었다. 당시 총학 정책이 등록금과 노동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입장이 어떤지, 녹색-환경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지 물어봤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딱히 기억은 안난다. 원론적인 이야기 - 노동이 풀리면 그런 문제들 역시 중요해지리라는 그런 것들이었고, 새벽시간이라 지쳐있었고, 나는 술에 취해있었다.


부총으로부터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별 말을 듣지 못했다. 실은 내가 다닌 학교의 선배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희대 - 이대쪽의 선배들을 거쳐서 총여학생회와 안면이 있었고, 그 부총학생회장이 총여쪽과 모종의 갈등상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총여학생회가 NL계열(대체 이게 무슨...)과 좀 더 근친적이기도 했었고. 여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총과 노동, 여성, 환경 등의 이슈에 대해 술에 취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그게 다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어떤 낙관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좀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 그래서 LGBT문제나 여성 문제가 사회의 주요한 이슈들로 확장되고 그것에 대응하며 나-세계의 관계를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 이 추상적 낙관을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돌이켜보건데 분명 그것은 낙관이었다.


지금은 그 낙관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나 또한 그 낙관의 연장선을 직접적으로 부여잡는 것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건 쓸쓸하고 무력하다. 여튼, 나는 그 낙관에 대해서 어느정도 낭만적 회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 제2차 가해나 여성에 대한 무례함을 "운나쁘다"가 아니라, "저것이 옳은 이야기이니 말과 행동을 삼가하자"가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 크게 확장되리라는 낙관이 있던 세계.


나는 그 세계의 수혜를 입었었고, 내가 방기하는 동안 그 낙관은 자연스레 퍼지리라 기대했었다. "기대했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정말로 기대했었던 것 같다. 바스라진 그 낙관들을 보며 운동에 있어서 a priori의 문제들이 해소되기를 바란 나의 유치함에 대해 쓴웃음이 나온다.


이 다음, 현재의 여러가지에 대해 한참을 쓰다가 그냥 지워버렸다. 지우면서 나는 절망을, 또 낙관을 생각했다. 이것을 구체적 문장들의 나열을 통해 나누기에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다.



scene 1. 저 봄에, 총여학생회와 세미나를 같이 하며 부총여학생회장에게 "그럼 이건희의 아내도 여성 이슈가 있는가?"를 물었더니, 그녀는 '같은 여성이기에 자본가라도 연대해야 하며 그것은 노동관계보다 앞선다. 그녀 역시 여성으로서 고통받고 있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이다'라는 요지의 대답을 했다. 당시 나는 참신한 개소리라 생각하며 총여실을 나왔다. 젠더 개념이 수입되어 여물지 못한 시절의 촌극이다.


scene 2. 2004년 처음으로 학내의 게이 커뮤니티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그것을 지지하던 우리의 대자보는 어용 총학생회에 의해 훼손 및 강제철거 당했다. 총학생회실을 발로 까고 들어가 썅욕해가며 멱살잡이 하던 기억이 난다. 총학생회가 어용이라는 것 - 특정 자본의 배경 아래 (자발적으로) 놓여 있다는 점들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태도를 지니게 하는것은 아닌가 하고 한탄했었다.


scene 3. 아마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치적이며 직접적인 공격과 숙청 등 여러 정치의 도구들을 페미니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시기 또한 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까지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몇몇 지점에서 오류이고 잘못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지점들이 페미니즘의 논의가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정상 정치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지점을 비판-비난 하는 것이 상식과 직관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이다. 권력, 가해자, 피해자, 생산에 대해 뿌꼬를 읽어대던 모두가 그게 무슨 말이었던가 하며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은 꽤나 한참 후였다.




이래서, 예전 이야기는 말하기도 쓰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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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6. 5. 31. 15:59

오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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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면 광주(5.18 광주민주화운동)를 생각했는데, 올해는 너무나 끔찍한 범죄들로 인해 광주를 생각하며 보낼 마음의 시간이 없었다. 송강호씨가 최근 광주를 다룬 영화의 택시기사로 연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광주를 다룬 영화 "광주물"에 대한 단평을 적어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 간접적으로 다룬 영화는 <26년>, <꽃잎>, <화려한 휴가>, <박하사탕>, <그해 여름>등이 거론된다. 각 작품들은 워낙 배우 이름도 있고 법정 혹은 여론에서의 인정투쟁도 있었고 하여 여튼 고만고만한 작품들 보다는 이름값이 있었다.


<26년>은 말도 안되는 충무로의 발작이었고,

<꽃잎>은 이정현의 귀기서린 연기만 너무 회자되었다.

<화려한 휴가>는 별 볼일 없는 헐리웃 열화카피 신파극이었고,

<박하사탕>은 광주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다고 하기 뭐해 이야기 할 것이 없고,

<그해 여름>도 딱히 뭐.


김현석 감독, 임창정 주연의 <스카우트>(2007)가 늘 광주를 다룬 영화 목록에서 누락되는 것은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은유이며 동시에 실재로서 광주를 다루는 이 놀랍고 능청맞은 이 영화가 마케팅 포인트를 광주에서 코메디로 돌린 것과, 사회적 독해력의 부재로 인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고의 영화로 이야기되지 못하는 점이 씁쓸하다.


광주를 생각하면, 몇년 전 죽은 한 선배가 생각난다. 내가 선배라고 부를 연배의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은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지내던 분이다. 남도 출신이었고, 강직하고 정의로우며 따듯했던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얼굴도 유쾌한 호남형에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장난기가 있었다. 


은선배가 미국 북동부에 갔을 때, 이웃집 노인들이 폭설에 발이 묶여 의료와 생필품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에 삽을 들고 길을 내주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 기억이 난다. 은선배와 같이 <화려한 휴가>를 함께 봤었는데, 영화는 엉망진창 똥덩어리였지만 광주 생각에 영화관을 나서며 눈시울이 붉었던 은선배의 모습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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