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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앵~~~

카테고리 없음 2016. 4. 20. 03:34

침묵의 관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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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 국가, 사회, 조직의 문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좋다/나쁘다로 단순화 할 수는 없지만, 외부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는 조직은-동어반복적으로-문제가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내부에서 구성원이 동의하는 합리적 과정을 통해 해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은 조직이 괜찮다 볼 수 있다. 문제의 해결을 관장하는 사람 혹은 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뜻일 테니. 반대로, 억압적으로 문제를 찍어눌러 없던 것처럼 꾸미려는 경우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문제가 많아도 문제고, 문제가 없어도 문제인 것.



02.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니지만, 외부-사법체계-를 호출하는 것은 사건의 규모와 심각성에 직접적 연관을 가짐에도,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며, 보다 중요하게는 조직과 개인으로부터 문제를 스스로 규정하고 해결할 힘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공통의 문제에 대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조직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제해결을 위해 조직이 기능하지 못할 때, 그때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외부를 호출해야 할 때가 아니라, (온건하게 말하자면) 조직을 해체하여 재 조립을 해야 할 때이다.



03.

많은 경우 나와 너,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드러난 것들에 대해 반응한다. 드러나지 않은 것에 어찌 반응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항상 침묵의 관전자들, 움직임과 흐름과 반응을 지켜보고 있으며, 어쩌면 그 움직임과 흐름과 반응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침묵의 관전자들에 대한 고려를 해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이 침묵의 관전자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움직이는 친구들 혹은 한때 친구라 생각했던 이들을 보면 왜 저럴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 할 지라도 절때 빼서는 안되는 타이밍이라는게 있는데.



04.

앨범을 준비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뤄야 하는 돈의 액수는 증가했고, 지불해야 하는 계약관계도 늘었고 그에 따라 이행해야 하는 의무도 가중되었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너무나도 불분명했고 판단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그 스트레스를 주변에 계속 전가하고 나 자신을 학대하지 않았나, 하여 반성한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무언가 빠트린 일은 없나 하고 각종 메일과 문서들을 뒤지고 싶다. 두어달 그렇게 살다보니 일에 대한 어떤 강박과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오는게 쉽지 않다. 엊그제 여덟시간 잔 게 너무나 좋았다. 



05.

침묵의 관전자가 항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 명령이거나 혹은 자기검열이 아니다. 침묵의 관전자는 사태 그 자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들에 대해 예민해지고 말을 삼가하고 행동을 조심하게 가져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커다란 이득이다. 결국 침묵의 관전자들이 사건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매일 매일의 고통에 꽥꽥대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06.

눈을 감고 천천히 어떤 흐름으로 접근하게 될 지를 상상하고, 그 흐름의 결절점마다 포인트를 하나씩 만들어두면 좋다. 물고기를 낚는 일이나, 사람을 낚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돈이 없다면 없는대로 헤쳐나갈 수 있는 구석이 있다. (또, 그런 구석이 아직은 그래도 있으리라 믿어본다.)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닥치는대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주 작은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 내 시간과 주의를 잠시 돌려야 하는데, 그게 좀체 쉽지 않다. 방법을 모색중이다.



07.

단순하게도 영화를, 음악을, 문학을 보고 듣고 읽는 사람의 마음속이 얼추 대부분 비슷하다. 단지 스스로가 포인트를 두는 지점이 다를 뿐. 시스템이 나쁘지않게 작동중이라면, 굉장히 특출나거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는 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이라 밝혀주는 것이 시스템의 몫이니까. 침묵의 관전자들이 그런 것은 아닐까. 



08.

아직도 무엇이 최선일까, 하는 외려 비인간적인 고민을 한다. 그건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 밖의 판단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다 지난 일이다"라며 뇌까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조심하고 삼가하는 것은 오래된 미봉책이다. 이 처세술을 삶의 윤리로 격상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09.

"I quit"을 선언하거나 혹은 "Fuck off"라고 외치는 선택지만 남은 상황이 극단주의 아닐까. 공존에 대한 포기, 타자에 대한 환멸, 견딜 수 없는 웅성거림. 한국 정치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승자독식 선거제를 닮은 무수한 그림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저 양 극단 사이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대화 없이, 자신의 뇌에서 정합적으로 발생한 연쇄에의 철썩같은 믿음들. 세계와 화해가 불가능한 시절.



10.

사랑은 대부분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승리하고 웃으며 그대를 안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변했다는 의미이다. 경철수고의 이 오래된 레토릭을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그토록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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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5. 3. 12. 16:11

실화 극장 : 티셔츠 찍던 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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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내가 활동가로 살다 쫒겨난 지 얼마 안 돼서 인디씬에 들어가 살 때다. 신촌 왔다 가는 길에 상수역으로 가기 위해 홍대 정문에서 일단 273 버스(Bus)를 내려야 했다홍대 정문 안쪽 길 가에 서서 티셔츠를 찍어 파는 문바가 있었다. 티셔츠를 한 벌 사가지고 가려고 한 장 거하게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티셔츠 하나 가지고 값을 깎으려오?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문바였다. 더 깎지도 못하고 찍어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문바는 잠자코 열심히 실크스크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가 만지는 것 같더니, 날이 저물도록 실크스크린 판형만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안 찍고 실크스크린 틀만 매만지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단색으로 찍어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공연 시간이 바쁘니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체 대꾸가 없다. 점점 공연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실크스크린 인쇄를 아니해도 상관 없을 것 같아 그냥 민무늬 티셔츠라도 달라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찍고 마를 만큼 볕을 쬐야 티셔츠가 되지, 쌩 잉크가 재촉한다고 티셔츠가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찍어댄단 말이오? 문바, 외고집이시구려. 차 시간이 없다니까‥‥‥.”

문바는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공연 시간은 어차피 늦은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諦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찍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찍다가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찍어야 할 티셔츠를 숫제 테이블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블라스트 비트를 두드려대며 흥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비로소 문바는 힘을 주어 실크스크린을 대고 잉크를 조심스레 부은 후 손가락 두께만한 나무판으로 단호하고 거칠게 박박 비벼대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티셔츠가 걸레짝이 될 것만 같았다. , 얼마 후에 티셔츠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티셔츠를 마구 뭉개 쓰레기통에 넣는다. 새로이 티셔츠를 꺼낸 문바가 다시 테이블 위에 셔츠를 두고 폴스 록을 흥얼거린다. 한참이고 멍하니 구경하던 날 보더니 문바가 하는 말이, 안준단다. 줄 생각이 없단다. ?


공연을 놓치고 다음 클럽을 가야 하기는 커녕 막차 시간마저 빠듯해진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실크스크린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本位)가 아니고 자기 본위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문바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문바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홍문관의 육중한 아래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어딘지 모르게 문바다워 보이는, 그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시커먼 눈매와 흰 콥스페인팅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문바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켜보니, 문바가 열렸는데 닫혀서 엑소가 옥세라고 야단이다. 여튼 힙해서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티셔츠 한 장 안찍는 문바의 모습을 보니 별로 특별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20억 아시아 엑소팬들의 설명을 들어 보면, 멤버 전신이 티셔츠에 나오면 흔하고 권위가 없어 입기에 부담스럽고, 한명만 실려 있으면 너무 빠순이 같아 민망하고, 얼굴만 나오면 멋진 몸을 볼 수 없어 아쉽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문바의 힙함에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문바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티셔츠(T-shirt), 빨고 오래 입어도 프린팅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사이 티셔츠는 실크스크린 인쇄를 하지 아니하여 무늬가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티셔츠를 뽑을 때, 질 좋은 잉크를 실크스크린에 잘 매겨 흠뻑 칠한 뒤에 겨울바람, 봄볕 다 쐬어가며 마른 뒤에야 시장에 내놓은다. 이것을 힙질 한다.”고 한다.


실크스크린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실크스크린을 짜면 1도는 얼마, 그보다 화려한 것은 얼마의 값으로 구별했고, 4도 인쇄(CYMK)한 것은 3배 이상 비쌌다. 4도 인쇄란, 어도비 마스터 콜렉션의 어매리칸 스탠다드 컬러에 맞춰 싸이언, 옐로우, 마젠타 블랙으로 색을 구별하여 총천연색을 구현하는 실크스크린 인쇄의 극치이다. 셔츠 장인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생산공정에 대한 이해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4도 인쇄를 위해 잉크를 나눌리도 없고, 또 말만 믿고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힙스터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힙한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心血)을 기울여 공예(工藝)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옥세 티셔츠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문바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하던 말은 그런 문바가 나 같은 힙스터 워너비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힙한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하는 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문바를 찾아가 치킨에 소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홍대 가는 길로 문바를 찾았다. 그러나 문바가 서있던 자리에 문바는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문바가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홍문관의 아랫도리를 바라다보았다. 육중하게 홍익대학교 정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홍문관 아래로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 그 때 그 문바가 저 막혀있는 하늘을 보고 있었구나. 강릉에서 태어나 온갖 예술병 환자들을 뚫고 대한민국 최고라는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들어가 티셔츠의 큰 뜻을 펼치고 싶었으나, 나 같은 이들에게 멸시나 받았구나. 열심히 티셔츠를 찍다가 유연히 홍문관 아래의 어둠을 바라보던 문바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아아, 문바여.


오늘, 홍대 룰루랄라에 들어갔더니 자이언트 베어가 술병을 뜯고 있었다. 전에 자이언트 베어를 아가리로 쿵쿵 패버렸던 생각이 났다. 그때, 자이언트 베어가 입고 있던 그 티셔츠가 바로 그 문바의 티셔츠이다. 요사이는 티셔츠 장인들의 실크스크린 슥삭질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사십여 년 전, 티셔츠 찍던 문바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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