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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앵~~~

카테고리 없음 2018. 5. 17. 20:28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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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보리라 생각했던 것이 30년이 걸릴줄은 몰랐다. 어릴 적 비디오 가게 앞에서 본 이 영화의 포스터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막막하고 답답하던 유년기의 나에게 포스터는 야했고, 미국이었고, 나중에 볼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영화는 89년작이고, 한국에서 비디오 가게 붐이 불어닥친게 88년 즈음이니 비디오 대여점 앞에서 포스터를 맹렬히 보며 생각하던게 90년 정도의 일이 아니었을까.


30년을 돌아 오늘 처음으로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Last Exit to Brooklyn"을 보았다. 보는 내내 마음이 비통했다. 그녀에게 닿고싶다.


Tralala



(요즘들어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들을 보는데,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한 편 한 편 보는데 마음이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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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8. 3. 22. 05:38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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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강렬함, 통속성, 너무나도 선명해서 사실 그 어떤 의미를 지시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불능과는 거의 무관하다. 몸의 진기가 다 빠져나가고 울어야겠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 덜컹거리는 버스, 진눈깨비 그런 것 처럼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죽어야겠다. 나는 대체 왜 무엇때문에 번민하고 고개를 숙이고 사랑을 갈구하는가. 죽어야 겠다. 이 생각만이 어제 밤 9시 21분부터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몸부림의 격렬함과 동일한 크기로 상존하는 이 세계의 무의미함.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저항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다가 몇 개월 후면 나는 툭 부러지고야 말겠구나, 내가 부러져서 나뒹구는 꼴을 내가 참을 수 있을까. 그냥 죽을까. 진눈깨비가 볼을 스쳐 녹듯, 벗어던진 내 외투 안에 스며들듯 그렇게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말도 안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며, 영화의 모든 것들을 불쌍히 여겼다. 배우들이, 스탭들이, 명멸하는 빛과 소리들이 불쌍했다. 저것들 또한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 맞서 토렌트를 거쳐 내 방안의 27인치 모니터와 3만원짜리 스피커를 통해 어떤 의미가 되고자 하는구나. 하지만, 무의미했다. 


무언가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사실 거의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그렇게 내 안의 혹은 공통의 무언가를 외화(外化)한 후 그 고통의 반대급부로 어떤 뿌듯함을, 인정을, 사랑을 갈구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비참하고 가엾다. 죽음마저도 지칠것 같은 생각들 또아리다. 답답하여 버스를 갈아타며 말보로 레드를 두 갑 샀다. 올해들어 처음으로 산 연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돌아와 고양이에게 캔 식사를 수저로 콩콩콩 찧어 주고, 보일러를 올리고 육신의 흥분으로 생각들을 털려 해도 도통 방법이 없다.


글을 SNS에 올려 어떤 구조신호를 혹은 이해를 받기도 귀찮았다. 중력의 비틀림에 걸쳐 궤도를 튕겨나간 돌덩이처럼, SNS는 나에게 안정적인 항성계였고 나는 그 항성계의 따스한 빛을 받을 일 없이 튕겨나간 돌덩이다. 하소연 할 곳 없이 그저 이상하게 늙어가고 있는 나. 막상 하소연을 하라 해도 어떤 감정인지 끄집어내지 못하겠다. 내 앞에 찰흙덩어리를 주고 지금 감정의 크기를 묘사하라 해도 난 별다른 조작을 가하지 못할 것 같다. 감정의 덩어리가 있고, 그것은 벙어리다. 


이런 생각들로 밤을 버텼지만, 아직도 밖은 어둡다. 내가 왜 이 어둠에 빠지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술 때문이다. 3월 21일의 미친 진눈깨비와 함께 마셨던 술 때문이다. 술이 나쁜 것이다. 술이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이다. 이 더부룩한 속과 광대뼈 아래로 느껴지는 미지근함과 우울, 이 우울은 모두 술 때문이다.


아니, 하나도 우울하지 않은데 그저 계속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울부짖지 않는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나는 아주 평온하고 합리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해시키고 싶지 않다. 또한 이해받고 싶지 않다. 현재의 상태가 일종의 발작이고, 두통일 뿐이라 생각한다. 나는 시간을 흘러보내며, 글을 쳐대며 저항할 뿐이다. 밤새 우주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코코아(무설탕)을 타 마시고, 물을 마시고, 고양이의 생사를 살피며 견딜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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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7. 10. 7. 04:07

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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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새벽 2시 30분. 모기 한마리가 날아든다. 모기가 내는 소리에 나는 헛박수나 헛뺨을 때린다. 신경을 긁어댄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잠옷 한 겹 벗고 방의 불을 켠다. 덤벼봐라, 손가락 사이로 시커멓게 짓이길테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피곤함이 밀려오지만 잠을 잘 수 없다. 모기다. 내 피를 빨아먹는 모기다. 아마 나에게는 그냥 잠을 잔 후 피 몇방울 헌납과 십자빵을 동반한 긁기를 수행하는 편이 훨씬 이익일 것이다. 그게 싫다. 모기이기 때문이다.


난 모기를 잡기 위해 불을 켰지만 내 생각에 잡혀먹히려 한다. 왜 사는게 수십년 째 이모양인가. 울컥대는 몸의 욕망들을 하릴없이 해소시켜야 하고, 테트리스처럼 쏟아지는 과제들과 요구들을 수행하며 내 일신을 편히 뉘이게 할 돈을 번다. 이 모기새끼들. 도저히 이기려 해도 이길 수가 없다. 매년 4월 부터 10월 까지, 일년의 절반이 모기다. 추위를 더위보다 훨씬 선호하는데 한국의 더위와 함께 동반되는 우울한 습도와 별개로, 겨울에 모기가 없다는 것도 이 선호에 일조한다. 모기가 없는 겨울.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너무 멋지다. 빨리 겨울이.


모기 때문에 잠을 못잔다. 모기 때문에 담배를 물었다. 저 조그마한 아미노산 프로그래밍이 수행하는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공격에 나라는 유기체는 너무 미약하다. 맹장수술 이후 상처가 잘 낫지 않는데, 그것이 나를 더 모기에 취약하게 만든다. 인공지능 어쩌구가 나오면 난 모기잡는 집사를 살 것이다. 빨래, 청소, 요리, 화분에 물 주기, 고양이 밥 주기 등등은 나에게 적절한 만족감과 노동의 요구들을 일깨우지만, 모기잡기는 그 쾌가 고단함보다 크지 않다. 모기를 때려잡지 않는 과학자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다. 이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아, 모기가 사라졌을 경우 위험에 대해 아직 예측하지 못한다구요. 네, 그 입장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모기란 말입니다. 심하다구요.


해소되어야 할 욕망이지만 부질없다. 밥 먹고 싶지만 때 지나면 똥 싸고 싶고, 신나게 놀다가도 내 땀과 체취로 가득한 이불로 쳐 들어가고 싶듯, 모기는 그런 나의 굴레안에 영원할 것 같다. 심지어 내가 유기체로서 기능을 정지해도 몇 분간은 모기가 노릴것만 같다는 생각에 모기가 커 보인다. 이건 신神과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음으로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전능함, 내 밤은 모기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울컥하며 올라오던 몸의 욕망도, 가까스로 잠들어야 한다고 외치던 뇌의 셧다운에 대한 요구도 모기의 괴롭힘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면 내 시야안에 띄일것이라 생각했지만 잠잠하다. 적에 대한 철저한 무력감은 사랑과 닮아가는 것인가. 정말 모기가 싫다. 싫다. 너무 싫다. 연속해서 네 마리를 잡았던 지난 밤이 달콤하게 떠오른다. 난 잠들어야 한다. 하지만 모기가 있는 한 쉽게 잠들 수 없다. 나는 분명 모기에게 피를 빨리겠고, 그렇게 생각하는게 마음도 몸도 편하겠지만, 내 의식과 모기는 양립불가능하다. 하나가 철저히 침묵해야 한다. 그게 날 돌아버리게 만든다. 욕망보다 지독하고, 일보다 버겁다. 그것도 매년, 일년의 절반을! 얼마나 하찮고 비루한 인간의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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