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웅앵~~~

카테고리 없음 2019. 6. 19. 00:23

비판의 소실점 : 삼성전자

반응형

2019년 6월 18일 장 마감 시가총액 순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공개된 기업의 크기 순은 다음과 같다. (■블록 하나는 10조, □블록은 5조를 뜻한다)

 

1. 삼성전자, 265조 ■■■■■■■■■■■■■■■■■■■■■■■■■■□
2. SK하이닉스, 46조 ■■■■□
3. 현대자동차, 30조 ■■■
4. 삼성전자 우량주, 30조 ■■■
5. 셀트리온 25조 ■■□
6. LG화학 24조 ■■□
7. 신한지주 21.6조 ■■
8. SK텔레콤 21.3조 ■■
9. 현대모비스 21.3조 ■■
10. POSCO 20.8조 ■■
11. LG생활건강 20.7조 ■■
12. 삼성바이오로직스 20조 ■■
13. KB금융 18조 ■■
14. NAVER 18조 ■■
15. 삼성물산 18조 ■■

 

삼성전자 + 삼성전자 우량주를 더하면 약 300조다. 삼성전자 제외 하위 기업들, NAVER까지 다 합쳐야 (삼성바이오, 삼성물산 제외) 겨우겨우 300조가 나온다. 삼성전자와 2위 SK하이닉스의 체급은 무려 6.5배 차이가 난다. 대한민국 1위와 2위의 차이가 6.5배, 300조 Vs. 46조. 예전의 알고 있던 현대니 LG니 하는 것들은 삼성 앞에서 푼돈장사다. 일단 이것이 한국 증시의 현재 상황이다.

 

삼성에 대한 비판 글을 많이 보게 된다. 세계적 압착기의 굉음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지겨울 때쯤 참 새롭다. 그런데 삼성전자에 대해 '나쁘다', '비윤리적이다', '공공성이 없다'등의 언어가 과연 삼성전자에 대한 술어로서 적합한 것인가에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삼성의 부당 노동행위, 정치개입, 생산 말단에서 중간까지의 총체적인 착취를 고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하고 동의한다. 그러한 고발과 언술행위가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 300조에 대한 의미를 파헤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분기 순이익은 10조가 넘는다(현대자동차 분기 순이익이 대충 5천억 쯤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금산분리 법이 없으면 삼성전자 일 년만 돌리면 신한지주+KB금융을 살 수 있고, LG전자 13조짜리 구멍가게는 삼성전자 4개월만 돌리면 살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경영권 방어문제로 가격은 크게 달라진다. 고정가로 대충 가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300조짜리 기업에 대해서 어떻게 사회적 통제를 해야 하는가, 300조짜리 기업은 어떤 잘못을 하는가, 이전에 300조라는 액수에 대한 의미를 파헤치고 알려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 못했다. 이것이 답답했다. 우리는 손가락 길이 7cm나 10km의 출퇴근 거리, 서울-부산의 450km는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서울-뉴욕 11,000km는 가물가물하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인 380,000km는 숫자만 남고 감각은 사라진다(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들어가고도 남는 거리다). 광년, 파섹 등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숫자로서 대/소 비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인간-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돈으로 가 보자. 친구가 100원을 먹고 튀면 피식 웃는다. 1,000원이면 왜 저리 쪼잔하게 사는지 답답하다. 10,000원이면 살짝 짜증이 나고, 100,000원이면 약간 심각하다. 1,000,000원은 바로 전화 들게 만들고, 10,000,000원은 절교, 100,000,000원이면 법원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300,000,000,000,000원은 감각을 벗어나 있다. 물론 이 거대 액수가 어떤 가치평가와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라는, 이 탈감각적 숫자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300조는 무슨 의미입니까? 300조는 어떤 잘못을 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이남에 그 300조는 어떻게 녹아 있습니까? 삼성을 옹호하는 푸른피 인터넷 떼쟁이들은 실로 반 계급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까? 이제 삼성에 대한 비판은 무슨 의미입니까? 부당함과 부정의함에 대한 의미들은 오늘도 깊이 깊이 파헤쳐져 벌어진 살틈에서 솟는 피들은 고통을 생생히 증언한다. 그만큼 저 숫자에 대해서도 열렬한 접근이 있었으면 하고.

 

삼성전자, LG전자, 소니의 고용인원과 분기별 순이익 등을 찾아 보면 점점 더 황당해진다. 우리 지구에 있는 제조업체 중 삼성전자보다 덩치가 큰 회사는 존슨앤존슨(제약/바이오 430조), 네슬레(F&B, 350조) 이 두 기업 뿐이다. 수치들을 찾아 볼 수록 비틀린 감각들이 계속 끼긱거린다. 어느 시점에선가 항복하게 되고 사건들은 그저 흘러가려 한다. 안되는데.

 

 

 

반응형
카테고리 없음 2019. 2. 8. 21:49

이토 준지 <인간실격>

반응형
Q : (...) 이토 준지씨의 <인간실격> 에 대해서 말씀 해 주신다면? A : 글쎄요... 일단 이토씨의 작품은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습니다만, 다자이 오사무씨의 <인간실격>은 제가 아는 한, 거의 모든 판본을 보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영원의 형식 아래에서 쓰여진 문학이니깐요. 이토씨의 <인간실격>에 대해서는 일단 아쉬움... 실은 좀 더 격하고 부정적인 감정입니다만(웃음), 네. 일단은 아쉬움이라고 해 두죠. 가볍게 들어가자면, 요조씨의 몰락과 방탕의 원인은 일본의 해체와 근대성의 성립에 좀 더 근원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많은 이들의 또 저의 이해이기도 합니다. 감정적 괴벽, 투명하게 드리워지는 여성의 호의는 요조라는 존재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 있어서 이토씨의 요조에 대한 해석은 외려 작품의 결과를 원인으로 도치한, 무엇인가 잘못된 공격이 아닌가 해서 의아했습니다. Q : 그 의아함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 A : 예를들어 요조는 인간 보편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그 개인이 흉기를 휘두를때, 요조는 그 흉기의 끝에서 피를 흘리는 인간 전체를 봅니다. 그것이 원작이 지닌 영원성 가운데 하나죠. 그렇다면 요조를 탄생시킨 두려움, 그것은 여성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토씨의 해석에서는 남성은 범접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두려움의 층위라면, 여성은 덧없고 제압가능하고 심지어는 알 필요없는 사소한 대상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몰이해의 층위는 자아에서 증폭되고 확장되죠. 그러니까 다자이씨의 요조는 뻔뻔하지 않지만, 이토씨의 요조는 사건이 있을 때 무분별하게 뻔뻔하다는 겁니다. 공포에 짓눌려서 남들이 보기엔 뻔뻔한 행동을 하는 나약한 인간과, 스스로의 뻔뻔함을 공포로 짓눌렸기 때문이라고 자위하고 항변하는 인간의 차이는 드러냈어야죠. 결국 '나'라는 것을 몰라 나는 나일수도 인간일수도 없구나... 이게 요조의 감정인데, 이토씨의 요조는 꽤나 스스로에게 투명합니다. 시각과 텍스트라는 장르적 차이에 기인할지도 모르지만, 여튼 이토씨가 분투해야 할 지점이 빗나갔구나 싶어 아쉬웠습니다. 오사무씨는 생전에 여성의 묘사에 대해 굉장히 천착했을 뿐만 아니라,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여성의 모습을 한, 다리에 시커먼 털이 숭숭 난 남성'이라 힐난하기도 했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이면서도 내밀한 어찌보면 사소설의 정수에 서 있는 <인간실격>에 있어서 여성이란 작가의 한계를 반영하며 회전하는데, 이토씨의 해석은 가볍다고나 할까... 풍류와 극적 장치를 위해 무분별하게 쓰였다고나 할까... 그렇습니다. 물론 이토씨가 여성을 오사무씨처럼 파고들어야 한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시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퇴행적인 면은 있었다고 언급 해 두겠습니다. Q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A : 이토씨의 이전 작품처럼 수많은 선들과 어둠으로 눈이 아닌 뇌를 자극하며 넘어가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것이죠... 예를들어 미성년의 요조를 하녀가 겁탈하는 장면등을 과감한 어둠속에서 배치했으면 하는. 그 뒤에 이어지는 우스운... 성적 어트랙션과 살인 또한 마찬가지죠. 웃기지도 않고 뭐랄까... 보는 이들로 하여금 냉담속에서 낙담하게 한다 할까. 이 장면들이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독자를 다음 페이지로 이끌지 모르겠지만, 요조가 지니게 된 어둠과 절망에 대해서 그 깊이감을 상실시킵니다. 이게 원작과 가장 불편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요조는 어둠과 성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조라는 사건에 어둠과 성의 난해함이 들러붙어 있는 것이죠. - 2019. 01. 쇼쿠호메이칸誌, 고바야시 다이치로, 작가 그리고 작가, 부분 발췌 및 번역


반응형
카테고리 없음 2019. 1. 8. 23:48

냉장실에 잘 익혀둔 콜라 한 캔을 따며.

반응형

2017년 그리고 2018년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해였습니다. 2017년 연말, 주변 사람들과 "올해는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내년에는 좀 나아졌으면"하고 말을 나눈 기억이 있는데, 2018년은 2017년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발작적인 웃음과 몇 번의 광기는 모두 저 두 해의 불운과 비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살덩이의 움직임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패시브였죠. 그리고 이어지는 발버둥. 돈을 벌어야지. 그래 돈을 벌자. 아, 담배도 끊자. 그래 살도 좀 빼자.


그래서 돈을 벌었고, 담배를 끊었고, 살도 뺐습니다. 정말 괴로운건 그 모든걸 제가 원해서 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삶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처음 만나는 두려움에 대한 반사작용이었습니다. 공포는 아직도 제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2019, 올해도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겹쳐 평일 24시간 내내 정확하게 저 혼자만 있게 되었습니다. 기약없이 계속 홀로 있다는 것은 실제로 몸과 정신에 고통을 야기합니다. 대출이나 연체로 인해 추심당해보신 적 있나요? 그것과 거의 느낌이 비슷합니다. 고독감에 의해 다른 사고기능이 마비됩니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 전화라도 걸어오면 전 재산을 다 줄만큼 취약해집니다. 카톡 한번 울리면 몸이 끔쩍끔쩍 놀랍니다. 모르는 번호가 뜨면 뇌에서 폭죽이 터집니다. 이런 연결이 저의 하루를 구원한게 벌써 몇 번입니다.


외로운 감각에 몸과 정신이 피폐하게 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진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의 절대적 접촉면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그 줄어든 접촉면을 유지하는 기술에 대한 문제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불안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스웨덴의 누드 자전거 대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회에 참여한 인간들은 울퉁불퉁했습니다. '아 진짜 사람이네'하는 감탄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상실한 감각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울퉁불퉁한 사람이 보고싶습니다. 몸도, 마음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아, 정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