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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8. 3. 22. 05:38증발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강렬함, 통속성, 너무나도 선명해서 사실 그 어떤 의미를 지시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불능과는 거의 무관하다. 몸의 진기가 다 빠져나가고 울어야겠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 덜컹거리는 버스, 진눈깨비 그런 것 처럼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죽어야겠다. 나는 대체 왜 무엇때문에 번민하고 고개를 숙이고 사랑을 갈구하는가. 죽어야 겠다. 이 생각만이 어제 밤 9시 21분부터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몸부림의 격렬함과 동일한 크기로 상존하는 이 세계의 무의미함.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저항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다가 몇 개월 후면 나는 툭 부러지고야 말겠구나, 내가 부러져서 나뒹구는 꼴을 내가 참을 수 있을까. 그냥 죽을까. 진눈깨비가 볼을 스쳐 녹듯, 벗어던진 내 외투 안에 스며들듯 그렇게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말도 안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며, 영화의 모든 것들을 불쌍히 여겼다. 배우들이, 스탭들이, 명멸하는 빛과 소리들이 불쌍했다. 저것들 또한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 맞서 토렌트를 거쳐 내 방안의 27인치 모니터와 3만원짜리 스피커를 통해 어떤 의미가 되고자 하는구나. 하지만, 무의미했다.
무언가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사실 거의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그렇게 내 안의 혹은 공통의 무언가를 외화(外化)한 후 그 고통의 반대급부로 어떤 뿌듯함을, 인정을, 사랑을 갈구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비참하고 가엾다. 죽음마저도 지칠것 같은 생각들 또아리다. 답답하여 버스를 갈아타며 말보로 레드를 두 갑 샀다. 올해들어 처음으로 산 연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돌아와 고양이에게 캔 식사를 수저로 콩콩콩 찧어 주고, 보일러를 올리고 육신의 흥분으로 생각들을 털려 해도 도통 방법이 없다.
글을 SNS에 올려 어떤 구조신호를 혹은 이해를 받기도 귀찮았다. 중력의 비틀림에 걸쳐 궤도를 튕겨나간 돌덩이처럼, SNS는 나에게 안정적인 항성계였고 나는 그 항성계의 따스한 빛을 받을 일 없이 튕겨나간 돌덩이다. 하소연 할 곳 없이 그저 이상하게 늙어가고 있는 나. 막상 하소연을 하라 해도 어떤 감정인지 끄집어내지 못하겠다. 내 앞에 찰흙덩어리를 주고 지금 감정의 크기를 묘사하라 해도 난 별다른 조작을 가하지 못할 것 같다. 감정의 덩어리가 있고, 그것은 벙어리다.
이런 생각들로 밤을 버텼지만, 아직도 밖은 어둡다. 내가 왜 이 어둠에 빠지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술 때문이다. 3월 21일의 미친 진눈깨비와 함께 마셨던 술 때문이다. 술이 나쁜 것이다. 술이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이다. 이 더부룩한 속과 광대뼈 아래로 느껴지는 미지근함과 우울, 이 우울은 모두 술 때문이다.
아니, 하나도 우울하지 않은데 그저 계속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울부짖지 않는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나는 아주 평온하고 합리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해시키고 싶지 않다. 또한 이해받고 싶지 않다. 현재의 상태가 일종의 발작이고, 두통일 뿐이라 생각한다. 나는 시간을 흘러보내며, 글을 쳐대며 저항할 뿐이다. 밤새 우주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코코아(무설탕)을 타 마시고, 물을 마시고, 고양이의 생사를 살피며 견딜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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