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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앵~~~

카테고리 없음 2022. 2. 24. 17:01

희미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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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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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건 싫건 땡전뉴스 시대에는 '사회'라고 불리울 무언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모두가 뉴스를 보고, 대통령이라는 기호를 명령으로서 접한다.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공통의 것'이 접착제 역할을 함으로서 성립된다. 그러니까, 공통의 것이 없다면 사회라 할 수 없다. 올림픽도, 월드컵도, 전두환도 어찌되었건 성능 좋은 접착제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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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왜 연예인들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된다. 그들은 공통의 것을 만들어주는 접착제다. 유재석, 김연아 뭐 이런 사람들이 벌어들이는 수백억에는 그들을 통해 사회가 형성되게끔 하는 능력 - 타자간에 공통의 것이 되어주는 능력에 대한 댓가가 진득히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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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대장동 이야기좀 해 보자. 대장동 관련하여 윤석렬 측에서는 이재명의 거짓된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재명 측에서는 윤석렬의 표리부동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 같은 족속, 한 배에서 난 새끼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그 둘이 지니는 '공통' - 이는 당신과 나 / 먼지같은 사람들에게 해당 없는 바로 그 '공통'. 장하성과 김상조의 몰락을 보라. 최순실 때려잡을때의 박영수와 포르쉐를 상납받고 화천대유 11억에 얽힌 박영수를 보라. 보라, 한 배에서 난 저 개새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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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나가서, 예전의 '사회를 이끈다는 주류'의 공통적인 속성은 다음과 같았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원정출산, 이중국적, 병무회피. 그리고 2020년대 주류의 특징은 뭐 이런 것 같다. 이력사기, 선택적 기억상실, 개명, 주식 투기, 자녀 특혜. 사실 이것은 유행의 변화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민감해 하는 주제에 따라 뽀록나는 경향의 변화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두 가지 멘탈리티 "지금껏 하던 일인데 새삼스레(우파)"와 "내가 이렇게 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거지(조국 like)"가 바로 저 사회를 단단히 뭉쳐주는 공통의 뽄드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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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사회는 누가 구성하는가? 나는 내 부모가 어떤 방송을 보고 좋아하는지 전혀 모른다(사실은 조금 안다). 유튜브 구독 리스트와 당신의 이메일 함 중에 무엇이 더 사밀한 공간인가? 사르트르의 1938년은 천국이었다. 그는 2022년 지하철 1호선 탑승을 거부한다. 우리는 타인을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가? 당신은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가? 유심히 관찰한 결과 우리 사회를 묶어주는 단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범죄', 그리고 범죄를 둘러싼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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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범죄에 대한 소식만이 많은 이들이 공유하였다. 올림픽따위는 보지 않아도 중국의 편파성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있다. 죄 그리고 벌, 또 죄 그리고 벌. 열 명의 시민을 모아두고 공통의 것을 찾을 때 이것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황당하고 끔찍한 죽음, 학대, 유린. 그 수많은 첨단 범죄를 통해 무엇이 되었는가? 우리는 범죄자 또는 범죄를 기획하는 자, 이 둘 중에 하나가 되었다. 자, 서울에서 걷고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명명한다. '범죄자' 오직 범죄를 품고 있는 자만이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먼저 말을 건넨다. 공통의 것이 없을 때 경계 이상의 적의를 안고 살아야 한다. 노인들은 흉포하며, 여성들에게 최대한 몸이 닿거나 시선을 둬선 안되고, 아이들을 바라보거나 건드려서도 안되며... 회피하라. 하지만 항상 커터칼 한 자루를 까르르륵 꺼낼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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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시민의 규율은 고립으로 정의된다. 희미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 사회를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보드리야르의 1981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직 부를 지닌 자만이 미디어를, 아니 스마트폰을 거부할 권능을 지닌 채 남양주 CC 9번홀로 여유있게 걸어간다. 가진 자들, 가지고 더 가지고 싶어 자식들의 삶 마저 자신의 소유속에 퐁듀로 만들어버린 개새끼들. 우리의 유대를 끊어버리고, 정치가 제공해야 할 차이를 비벼버린 저놈들. 절단된 신체의 우리는 간단히 차이를 체크한다음 당당히 혐오를 선언한다. 연대와 평화, 이웃과 그리고 공존(이라는 단어를 대체 얼마만에 적는가)은 아파트에서 2달만 살아도 깨끗이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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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낼 차례 : 가까스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솟구치는 비용. 공통의 것을 만들어주는 자에게 허용되는 재화. 아이도, 어른도, 지식인도, 사기꾼도, 노인도 - 그러니까, 4G 이상의 통신망에 자유로이 접속할 수 있는 현생인류 그 누구나 관심을 향해 두 팔 두 다리 모두 벌려 누워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의 것이다. 삼성과 애플과 가상인간과 회원제 클럽과 생수 구독과... 저 접착제를 생산하는 참다운 주체에게 수만의 하트를, 수십억의 돈을, 끝없는 공중파 점유권을, 사회 그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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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리는 오래도록 만나지 않은 이의 글을 봄으로서 그의 최신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의 프로필 사진 업데이트를 확인함으로서 이웃의 안녕을 보았노라 믿는다. 진짜 인간의 알몸을 본 적은 언제인가? 진짜 인간의 알몸을 본 적은 언제인가? 우리가 빼앗긴 것은 그깟 디지털 데이터 더미로 전락한 돈도 아니고, 어차피 가질 수 없던 부동산도 아니며, 믿거나 말거나 의료와 주식과 연금이 아니다. 우리가 약탈당한 것은 사회 그 자체이며, 그것을 다시 강탈해 와야 한다. 난폭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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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논평하는 자들로부터. 소비로 증명하는 자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저 - 동일한 유전자만을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돌연변이 없는 정치로부터. 열렬한 궁핍, 허기의 전조와 상반되게 세계는 = 희미한 사회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20대 대선 공보물과 삼성, 애플의 신제품 브로셔 가운데 당신에게 더 중요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것은 가짜 질문이다. 진짜 질문을 쑤셔대야 할 이들은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이 중범죄에 대해 어떠한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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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건이 아닌 건설에 대한 희구이다. 타자가 아닌 단백질 더미들 사이를 떠도는 회백질 세포가 원하는 변태이다. 만나주지 않는다 살인하고, 무시한다 사람을 죽이는 즉물적인 끔찍을 살포한 다음 오만원이 수십억으로 변했다, 땅콩을 쥐었으면서 황금을 쥐었다 선언하는 하는 저치들에 대한 증오다. 2008년의 바우만도 알지 못했던 미증유(시간은 언제나 본디 미증유이다)를 안은 불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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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대선의 기능은 무엇인가? 불이나고 담벼락이 무너지고 살인자가 칼을 들고 달려올 때, 저 선전물 속 그 누구도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전진은 없다. 절망은 가능하다. 만나고 싶다면 학원에 등록하고, 호텔 수영장과 자동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글쓰기 모임에서 시를 써라. 그게, 당신이 이룩한 최선의 사회이길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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