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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6. 5. 26. 01:23칼과의 거리
1.
칼과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이제는 서로 독립적이고 자기통제력이 있는 성인이기에 그 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며, 위험요소를 나서서 제거하며 개입하는 것이 옳은 일만은 아니라 생각했었다. 아주 오래전의 나는 누군가의 안전과 행위에 개입하고 싶어했었지만, 그것이 내가 통제를 가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러한 개입의 부당함과 힘의 우월적(억압적) 행사에 대해서 조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칼과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칼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10km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칼과 그토록 떨어져 있다면 우리 서로가 화장실에 간다거나 집에 늦게 간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 일단은 예민할 필요는 없다. 10km밖의 칼이 우리를 맞출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칼이 저 문을 나서고 100m 전방에 있다면, 우리가 공용장소를 이용하려 움직일 때 10m 근방에 곧장 명치를 향해 날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경고를 해 줘야하고, 조심하라고 말해줘야 하고, 서로가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기 전에 위험에 대해 스스로를-서로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
인도와 멕시코, 브라질의 몇몇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지역을 만들고 그곳에 담장을 세운다. 그 다음 사설경비원을 고용하여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한다.
이에 따라 빈자들은 단절된 세계를 직접 보면서 허무함과 증오를 키우게된다. 중산층들은 처음에는 부유층들의 전략에 대해 비난하고 세상을 더 나쁜곳으로 만드는 전략이라 비난하지만, 바로 저 익명의 칼을 막는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이란 분리주의에 있음을 알고 유사-분리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분리주의는 사회의 파국으로 향한다. 그것은 가장 혐오스럽게 쌓여진 계급장벽이며, 우리가 좀 더 자유롭게 되기를 포기하는 가장 값비싼 자해행위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분리주의적 정책들이 이야기되고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상호신뢰를 복구할 수 없으며, 그 신뢰복구의 비용보다 통장잔고를 활용하는 것이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다.
3.
그래서, 한국에서의 그 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이 느끼는 일반 감정, 전도되어버린 행정력, 국가라는 이름의 무능을 보면 나는 매우 가까이에 있다고 느낀다. 사실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슬픔을 자주 느낀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저 분리주의의 유혹을 강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 혹은 특정 정치집단이 분리주의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판매한다면.
칼이 멀리 있다거나, 혹은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끔 강제하는 사회적 구속력이 있다거나, 혹은 칼이 휘둘린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방어막이 튼실하다면 -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이다 - 이러한 사고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우울을 하나하나 끄집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이 가깝다고 느낄 때, 우리 사회를 보고 느끼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윤리적/도덕적 언술과 태세하는 것이 희망을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판단이 든다.
4.
우리는 안전하길 바라며 동시에 자유롭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안전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안전을 미끼로 흔들어대면서 자유를 거래하는 저질 상행위가 국가의 이름으로 버젓이 사회에 통용된다.
그 칼과의 거리를 생각한다. 어둡고 깊은 5월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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