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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내가 대학 마지막 학년을 다니며 취업준비를 하느라 서울 도심 속 쥐구멍만한 고시원에 살 때다. SSAT 기출문제집을 사러 모처럼 고시원에서 나와 교보문고로 갔는데, 그다지 마음에 드는 기출문제집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온 김에 자소서 작성요령이나 사가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참에 마침 자소서를 대필해준다는 노인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네가 흰 A4용지를 쌓아두고 앉아있었다. 어지간히도 필력이 좋은 노인네였나보다.

자소서나 써봐달라고 부탁했다. 한장씩은 안 파는 것 같았다. 
한장만 써 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자소서 한 장 가지고 어디 얼마나 쓰겠소? 정 비싸거든 시중의 작성요령서나 사가시오."

듣자하니 노인의 심뽀에 화가 났지만, 자소서는 특성상 여러 사람들이 쓰던 것을 쓰면 좋지 않기에, 납득하기로 하고 그저 잘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쓰는 것 같더니, 날이 저물도록 종이뭉치를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나에게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등을 물으며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쓰고 있다.

인제 그 정도면 충분히 인사담당자를 떡실신 시킬 수 있으니 됐다고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이다. 하루종일 취업걱정에 다리도 피곤하여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초초하고 짜증나서 내용도 안보고 대충 사버릴 지경이다.

"더 쓰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 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쓸을 만큼 써야 자소서라 할 수 있지, 무턱대고 인사담당자에게 들어간다고 자소서가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직접 쓸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쓴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지금 빨리 돌아가야한다니까."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라며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는 없고, 어차피 망한 취업 지금 돌아가서 인터넷 뒤져보는 것도 생각하니 마뜩찮아, 될대로 되라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요 며칠간 머릿속에서 살아본 인생 안살아본 인생 죄다 짜내었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자포자기한 심정도 있었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써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문장이 거칠어지고 글맛이 안 좋아진다니까. 자소서는 제대로 써야지. 쓰다가 놓아버리면 쓰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쓰던 것을 숫제 공중에 들고 태연스레 바라보고 만지작 거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고만 지쳐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노인은 몸을 구부려 쓰기 시작한다. 저러다가 자소서가 다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자소서를 들고 유심히 바라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돼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자소서다.

좌판을 일어서던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가지고 장사가 개판일 수 밖에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꼴에 폼을 잡는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문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기지개를 펴면서 좌판 낚시의자에 측은하게 쪼그린다. 그 앉아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홀아비같아 보이고 쭈글한 눈매와 콧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것이다.

고시원에 도착하자마자 노인이 준 자소서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나의 인상과 대화에서 유추해낸 여러 이야기들을 노인의 필력으로 유려하게 적어 놓아 보는 나도 그 재미에 푹 빠졌다. 곧 여러 대기업 인사담당자에게 자소서를 쑤셔넣었는데, 나의 기분이 전달 될 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몇일 후 몇몇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자소서가 참 재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스터디하며 공유했던 다른 자소서들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인사담당자에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소서가 너무 길거나 꾸밈이 많으면 저 말이 진실인가 싶어 의심이 가고, 너무 짧고 직선적이면 응시자가 성의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정말 재치있고, 청춘의 고뇌를 해학으로 풀어낸 유쾌한 자소서는 처음이라며 인사담당자가 전화기 너머 살짝 웃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몇일이 지나지 않아 마음에 드는 기업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자소서는 좋은 단어를 골라 문장을 만든 후에, 거친 삶의 궤적을 섬세하게 다듬은 후 고급 어휘와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을 단정함과 자신감으로 마무리 해 인사담당자에게 최적의 쾌감을 제공한다. 이것을 '글로 후린다'라고 한다. 그런 명문으로 자소서를 쓰게되면 인사담당자는 '처음에는 담담하지만, 보다보면 지원자에 대한 호의가 어느새 온 몸을 휘감아 원서접수를 절로 통과시키며 면접에서도 가산점을 주는' 순서를 그대로 따르게된다.

그러나 요새의 자소서는 엉터리 문장을 나열하는데다 인생의 궤적들도 인터넷에서 대충 물어 본 것들로 메워놓고 끝이다. 인터넷에서 본 문장과 정보들이라 얼핏 보기에는 더 근사해보이지만, 막상 제출해보면 무척 엉성하고, 인사담당자에게도 쉬이 뽀록나는데다 면접에도 악영향을 미쳐 취업계획이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인 요새에 이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의 인생역정을 세련되게 닦아 적어 주는 자소서의 장인이 있을 턱이 없다.

면접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서울대를 나오면 얼마, 고려대는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유학을 다녀 온 것들은 세 배이상 비싸다. 유학을 다녀 온 것이란, 좋은 부모를 만나 이쁜 서양 여자, 멋진 서양 남자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며 정신과 육체의 학습, 게다가 언어능력까지 뛰어나니 기업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스펙을 보고 사는 것이다. 돈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서류에서 탈락하는데 스펙이니 뭐니 해도 도통 감을 잡을 수도 없고, 유학이라고 하여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취업은 취업이요, 꿈은 꿈지이만, 자소서를 쓰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자소서를 쓴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인생을 쏟아냈다. 이 자소서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청년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자소서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대창에 소맥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시내에 나가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세종문화회관의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으로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자소서를 쓰다 유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오피스텔에 들어갔더니 동생이 자소서를 쓰고 있었다. 전에 자소서를 쓰며 고뇌하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자소서를 써본 지도, 본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스터디 그룹에서도 서로의 자소서를 돌려 보는 풍경을 볼 수 없다 한다. 애수를 자아내던 그 풍경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이년 전, 자소서 쓰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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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미술 2011/10/25 02:4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으앗!! 재밌어요 ㅎㅎㅎ 현대문학 읽는 느낌 ㅎㅎ 잘 읽었어요^,^

  2. Favicon of http://www.nis.co.kr BlogIcon 해파리 2011/10/25 03:1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으엌ㅋㅋㅋ 쩐다 ㅋㅋ 대입 자소서 쓸때 생각나네 으하하하하 대박ㅋㅋㅋㅋ

  3. Favicon of http://flyinghendrix.tistory.com BlogIcon 양승훈 2011/10/25 07: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허생전은 시리즈 물이기 때문에~~ ㅋㅋㅋ 잘 읽었어요 피코짱

  4. Favicon of http://blog.jinbo.net/taiji0920 BlogIcon 뎡야 2011/10/25 15: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야 이거 대박 ㅋㅋㅋㅋ 재밌다
    근데 뒷부분 너무 길어서 텐션 떨어져
    간만에 졸라 웃엇어 ㅋㅋㅋ

  5. 크리링 2011/11/15 02: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피코 글 정말 좋아.

  6. 정용석 2011/12/01 03:1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건 "방망이 깍던 노인"의 현대판....
    별.....

  7. Favicon of http://www.jisupark.com BlogIcon JisuPark 2011/12/08 18: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ㅋㅋ 방망이 깎던 노인 패러디 재밌고 유쾌하게 읽고 갑니다.
    댓글을 남기게 하는 맛깔나는 어휘네요 :D

어렵네요.
졸업 후 삶의 압박이 이렇게 심해진 시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력서를 때려넣고 이래저래 팔 뻗어 알아보려 노력하는데, 저를 반기는건 Sims Social 뿐입니다.

저에게는 어떤 강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이라고 구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열패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무서운 눈매였을까요,
아니면 개인에게 무력감을 심으며 '너는 대체가능한 부품'이라 말하는 자본주의 였을까요.

MT라면 좀 신나는 기분으로 함께 준비해야 하겠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군요.
그저 숟가락 얻는 인생, 네 딱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망했다'라는 말이 유희에서 뼈져림으로 변화할 때,
배가 고플까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멍하니 글만 쓰며 노트북 모니터만 바라볼 때,
갑작스러운 공복에 온몸이 아찔하고 손이 떨릴 때,
저는 망하는 것이 두렵고 공포스럽습니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공포에의 상상으로 인해 공포에 빠지게 된다 하더라도,
고통이 오는 순간 초연하기는 무척이나 힘든 노릇 같습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입사지원서를 우겨넣습니다.
사실 되리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하는 심정이죠.
마치... 대학시절 운동하던 기분입니다. 사태는 무너져내리고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은.


저는 지옥에서 웃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삶을 살아낼만하다 믿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극일 것입니다.
그 연극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요.
노력하고 있을 때 천둥벌거숭이처럼 허우적거려도 괜찮다는 안도감.
그것이 자본주의 마약이라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똥물에도 파도가 있고, 파국에도 도화선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망하는 모습을 하나의 징후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웃어봅시다.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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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8. 13 update
연락처를 교환 한 후에 전화를 한 번 주셔서 제 목소리를 확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녹음 파일을 올려놓을까 계획 중입니다만 아직 난감한 상태입니다.
시 낭송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2011. 08. 14 update
소설책의 경우 주변 사물에 대한 묘사와 짧은 대화문이 많을 경우 읽는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단편소설 등 2시간 내에 소화가능한 글이 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에세이 종류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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